“노화는 자연”이라는 문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암·심혈관질환·당뇨·치매를 따로 떼어 고치던 시대가 길었다. 최근 연구 담론은 거꾸로 올라간다. 병의 가지를 자르지 말고 뿌리를 만지자는 주장이다. 세포 기능 저하, 만성 염증, 유전자 발현 조절의 붕괴, 미토콘드리아 손상 같은 단어들이 그 뿌리로 불린다. 듣기만 해도 그럴듯하다. 지점은 그 다음이다. 뿌리를 만지겠다는 말은 ‘노화 자체’에 손을 대겠다는 선언과 같다.
의학계가 말하는 변화는 분명하다. 질병이 생긴 뒤 처치하는 방식의 한계가 누적됐다는 자각이다. 다병(多病) 고령 환자는 한 과의 처방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약은 늘어나고 부작용은 겹친다. 건강수명을 늘린다는 목표는 이 문제의 언어다. 수명을 늘린다는 구호보다 덜 자극적이라 더 팔린다. 현실은 냉정하다. “건강한 기간”이라는 단어 뒤에는 의료비, 보험 재정, 돌봄 노동의 계산서가 붙는다. 논문은 그 계산서를 대신 내주지 않는다.
노화 표적 치료라는 표현이 등장한 배경도 비슷하다. 세포 노화를 제거하거나 억제한다는 접근, 염증성 노화 조절, 대사·에너지 경로 재설계, 유전자 발현 조절 메커니즘 같은 전략이 묶여 하나의 장르가 됐다. 연구실에서는 설득력이 있다. 임상으로 나오는 순간 질문이 거칠어진다. 어떤 개입이 ‘치료’로 인정될지, 위험 대비 이득이 어디까지 입증돼야 하는지, 실패했을 때 책임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 단어 하나가 제도를 흔든다. 질병으로 규정하면 치료 기준이 생기고, 기준이 생기면 비용이 생긴다. 비용은 결국 사회가 낸다.
생물학적 나이를 수치화하려는 흐름도 논쟁을 키운다. DNA 메틸화 패턴, 염증 지표, 대사 마커로 노화 속도를 재려는 시도는 매력적이다. 숫자는 권위가 있다. 숫자는 오해도 만든다. 특정 지표의 변동이 곧바로 ‘젊어짐’으로 번역될 때, 사람은 검사 결과를 신분증처럼 들고 다니게 된다. 건강 검진이 평가가 되는 순간이다. 보험 상품과 고가 프로그램의 판촉 문구가 붙기 좋은 판이다. 측정이 가능해졌다는 말은 거래가 가능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업계 관계자는 “노화 속도를 숫자로 보여주면 고객이 지갑을 연다”고 말했다. 현장 담당자 A씨는 “프로그램을 끝낸 뒤 재검사를 요구하는 사람이 늘었다”고 했다. 숫자가 신뢰를 대신하는 장면이다. 문제는 그 숫자가 언제, 누구에게, 어떤 예측력을 갖는지 아직 균일하게 답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개인차가 크고, 생활 습관의 변수가 복잡하다. 불확실성을 인정하면 상품이 약해진다. 확신을 팔면 과학이 닳는다.
노화를 질병으로 볼 것인가라는 논쟁은 윤리로 이어진다. 질병으로 규정하는 순간, 늙음은 ‘관리 실패’처럼 낙인찍힐 위험이 있다. 건강한 노화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프레임이 생긴다. 반대편도 깨끗하지 않다. 노화를 자연으로만 남겨두면, 예방과 조기 개입의 가능성은 개인의 경제력에 따라 갈린다. 치료가 아니라 ‘웰니스’라는 이름으로 시장이 먼저 장악한다. 규제는 느리고, 광고는 빠르다.
한국 사회의 취약점은 더 노골적이다. 고령화 속도는 세계 최상위권인데, 의료 시스템은 질환 중심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중년기 조기 개입, 기능 유지, 삶의 질이라는 말은 정책 문장에선 보인다. 예산과 제도 설계에서 자주 흐려진다. 노화를 표적으로 삼는 연구가 학술 영역에 머문다는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연구 성과가 사회로 번역되는 과정이 빈약하다. 번역이 빈약하면 시장이 먼저 번역한다.
노화를 조절 가능한 과정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는 흥미롭다. 흥미로움만으로 의료가 움직이면 곤란하다. 치료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사회는 그 치료를 감당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준비가 없다면 남는 것은 불평등한 접근권과 과열된 상업화다. 노화가 질병이냐는 질문보다 더 불편한 질문이 남는다. 그 이름표를 붙인 뒤, 누가 비용과 책임을 끝까지 떠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