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에선 평지 둘레길도 순식간에 함정이 된다. 낮에 녹았다가 해가 기울며 다시 얼어붙은 얇은 빙판은 눈보다 더 교활하다. 겉은 말라 보이는데 발끝이 미끄러지는 순간, 몸은 반사적으로 틀어지고 무릎과 손목이 먼저 땅을 친다. 응급실에선 이런 부상을 ‘미끄러짐’이라 부르지 않는다. 겨울 산행의 시작은 장비가 아니라 오판이다.
트레킹과 등산을 같은 말로 뭉개는 순간부터 안전은 흔들린다. 완만한 숲길을 걷는 트레킹은 체력이 아니라 노면이 변수다. 낙엽이 덮은 얼음은 검은 유리처럼 미끄럽고, 물기 먹은 흙길은 바닥이 한 번에 꺼진다. 운동화로도 갈 수 있다는 말이 사람을 홀린다. 방수와 접지력이 약하면 ‘걷는다’가 아니라 ‘버틴다’로 바뀐다. 짧게 다녀오면 된다는 생각. 그게 제일 위험했다.
정상 찍는 겨울 등산은 다른 종목이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바람이 체온을 빨아먹는다. 숨은 가빠지고 땀은 난다. 땀이 식는 속도는 빠르다. 걷는 중엔 덥다가 멈추는 순간 추워진다. 체감온도는 숫자가 아니라 피부에서 먼저 온다. 무리하게 속도를 내는 초보자들이 흔히 쓰러지는 구간이 정상 부근이 아니라, 내려오는 길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아이젠은 ‘있으면 좋다’ 정도로 취급되곤 한다. 평지 트레킹에선 실제로 그럴 때가 많다. 문제는 그 경계가 매번 달라진다는 점이다. 같은 코스라도 그늘진 사면,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암반, 사람들 발로 눌려 단단해진 눈길은 갑자기 등산 코스의 얼굴을 드러낸다. 아이젠을 챙기지 않은 사람이 뒤늦게 후회하는 장면은 겨울마다 반복된다. 중요한 건 구매 여부가 아니라, 가방 안에 넣어둔 채 쓰지 못하는 상황이다.
두꺼운 패딩 한 벌로 해결하려는 방식은 겨울 산에서만큼은 구식이다. 몸이 달아오르면 땀과 함께 열이 빠져나가고, 멈추면 젖은 옷이 냉각판 역할을 한다. 기능성 이너, 보온층, 방풍층을 나눠 입는 이유가 있다. 지퍼 하나로 열을 빼고, 휴식 때 외투를 얹는 단순한 동작이 체온을 지킨다. 장갑과 모자는 사치가 아니다. 귀와 손가락이 먼저 무너진다. 짧다.
시간 계획은 체력과 무관하게 생사를 가른다. 겨울엔 해가 짧다. 오후가 되면 기온이 떨어진다. 하산길에서 길을 잃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산을 ‘즐기는’ 단계가 아니다. 랜턴을 챙기지 않은 채 “금방 내려가겠지”라는 말이 나오면 이미 늦었다. 구조 요청이 늘어나는 시간대가 해 질 무렵이라는 얘기가 현장에서 자주 돌았다. 현장 담당자 A씨는 “겨울엔 하산 시간을 먼저 정해 놓지 않으면 일정이 아니라 사고가 된다”고 했다.
산행 문화도 변했다. SNS 사진이 목표가 되면서 ‘가볍게 다녀왔다’는 과장이 흔해졌다. 방풍 재킷, 아이젠, 보온 레이어를 챙긴 사람은 인증샷에서 눈에 띄지 않는다. 반대로 얇은 옷차림은 화면에 멋지게 남는다. 업계 관계자는 “렌털 장비가 늘면서 진입 장벽이 낮아졌지만, 장비가 실력을 대신해 준다는 착각도 같이 커졌다”고 말했다. 겨울 산은 친절하지 않다. 준비의 공백을 정확히 찌른다.
초보자에게 ‘트레킹부터’라는 권고가 자주 나오지만, 그마저도 코스 선택이 엉성하면 무의미하다. 사람 많은 길, 접근성 좋은 코스, 되돌아올 여유가 있는 일정이 최소 조건이다. 정상 욕심이 붙는 순간 판단은 흐려진다. 산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사실 ‘정상 사진’을 좋아한다. 겨울 산행에서 그 취향은 얼마의 대가로 계산될까.